설교 구조 흐름도
서론
우리는 무엇을 들고 왔는가
한 주간 해결하지 못한 고민·감정·고난을 안고 모인 자리
고후 1:4 —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감정이 아니라 감동
딤후 3:16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곧 하나님의 말씀이 감동
고후 1:4 딤후 3:16
배경
바울의 눈물의 편지와 고린도 교회
분쟁·음행·소송·우상의 제물로 무너진 고린도 교회
바울이 보낸 강한 책망의 편지 → 디도를 통해 들려온 회개 소식
그 소식에 바울이 다시 펜을 들어 쓴 것이 고린도후서 7장
고후 2:1-4 고후 7:5-7
본론 1
후회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바울도 흔들렸다 — 그러나 결과가 그 흔들림을 의미 있게 만들었다
근심(λύπη, 뤼페) 자체는 중립적, 어디로 흐르느냐가 본질
고후 7:8-9
본론 2
두 가지 근심 — 사망 vs 구원
세상 근심(κοσμικὴ λύπη) → 후회·자책·도피·사망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κατὰ θεὸν λύπη) → 회개(메타노이아)·돌이킴·구원
같은 사건, 같은 감정,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결말
고후 7:10
본론 3 — 핵심
감정과 감동 사이
감정 — 나에게서 나에게로 도는 흐름, 머지않아 사라짐
감동 — 하나님으로부터 내게로 들어오는 숨, 사람을 돌이키게 함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곧 하나님의 감동이 내 감정 속에 들어온 것
고후 7:10 딤후 3:16
중간 포인트
가정에서의 감동
자녀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 나는 감동의 사람인가?
가정의 근심과 다툼이 감동으로 변화될 때, 가정 전체가 회복된다
적용
감동이 만드는 일곱 가지 흔적 (7:11)
간절함 · 변증 · 분함 · 두려움 · 사모함 · 열심 · 벌함
모두 동사가 살아난 모습 — 가만히 앉아 있던 감정이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오늘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
고후 7:11
결론
감동의 자리로
철야의 자리는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감동의 자리
오늘 들고 온 감정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감동이 들어온다
그 감동이 회개를 낳고, 회개가 우리를 살린다
서론
배경
본론
핵심 본문
중간 포인트
적용
결론
서론 금요철야의 자리에 들고 온 것

한 주의 끝, 우리는 각자의 감정을 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후회를, 어떤 사람은 분노를, 어떤 사람은 무력감을. 그런데 그 감정의 뒷자리에, 하나님이 만지시려는 무엇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경계 — 감정과 감동 사이 — 에서 시작합니다.


배경 눈물의 편지와 고린도 교회
① 고린도 교회의 무너짐

분쟁(고전 1장), 음행(고전 5장), 성도 간 송사(고전 6장), 우상의 제물(고전 8장), 영적 은사 다툼(고전 12-14장). 바울이 세운 교회였지만 그가 떠난 사이 깊이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② 바울의 눈물의 편지
고린도후서 2:1-4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기에 강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보낸 뒤에는 마음이 무거워져 "이 편지가 그들을 너무 상하게 한 것은 아닌가" 후회까지 했습니다.

③ 디도가 전한 소식
고린도후서 7:5-7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디도를 통해 들려온 소식 — 고린도 성도들이 그 편지를 받고 근심했고, 그 근심이 회개로 이어졌다는 것.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이 다시 펜을 들어 쓴 것이 오늘의 7장 본문입니다.


본론 1 후회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7:8-9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바울도 한 사람의 목회자로 흔들렸습니다. 강하게 말한 뒤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고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를 채운 것이 무엇일까요?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근심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근심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가 본질입니다. 같은 한숨, 같은 눈물도 —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사망이 되고,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구원이 됩니다.


본론 2 두 가지 근심 — 사망과 구원
고린도후서 7:10 (핵심 구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λύπη (뤼페) — '근심·슬픔·고통'. 본문에서 두 번 사용되지만 앞에 무엇이 붙느냐로 갈린다.
① 세상 근심 (ἡ τοῦ κόσμου λύπη)

결과에 대한 근심, 들킬까에 대한 근심, 나의 평판에 대한 근심. 자기 안에서 빙빙 돌다 자책·도피·무너짐으로 흐릅니다. 바울은 그 끝을 "사망"이라 말합니다.

②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κατὰ θεὸν λύπη)

하나님 앞에서의 근심, 죄에 대한 근심, 망가진 관계에 대한 근심. 자기 안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로 향하다 회개·돌이킴·새로움으로 흐릅니다. 그 끝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 그래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같은 사건, 같은 감정으로 시작해도 —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두 결말이 갈립니다.


본론 3 — 핵심 감정과 감동 사이

우리는 매일 감정을 느끼며 삽니다. 미안한 마음, 후회되는 마음, 화나는 마음, 무거운 마음. 그런데 그 감정이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우리는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 핵심 구분 — 감정 vs 감동

감정은 나에게서 나에게로 도는 흐름입니다. 자극 → 반응 → 사그라듦. 머지않아 사라집니다.

감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게로 들어오는 숨입니다. 사람을 흔들고, 멈추게 하고, 돌이키게 합니다. 사라지지 않고 방향을 바꿉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곧 하나님의 감동이 내 감정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같은 근심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가 다릅니다.


중간 포인트 가정에서의 감동

감동이 우리 안에서 일하는 가장 가까운 자리는 가정입니다. 자녀에게 반성을 요구하면서, 정작 나는 자녀에게 감동이 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아내에게·남편에게 이런저런 말을 던지지만, 내 배우자에게 나는 감동인 적이 있었던가?

▸ 가정에 감동이 흐를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가 회복되는 것처럼 — 가정 안에 그 감동이 넘쳐 흐르면, 자녀가 변화하고, 아내가 변화하고, 남편이 변화됩니다. 가정의 모든 근심과 다툼이 감동을 만나는 자리가 곧 회복의 시작입니다.


적용 감동이 만드는 일곱 가지 흔적 (7:11)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바울은 감동의 결과를 일곱 가지 단어로 묘사합니다 — 모두 동사가 살아난 모습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던 감정이,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 일곱 가지 흔적
간절함(σπουδή) — 이전엔 무관심했던 일에 마음이 달려간다
변증(ἀπολογία) — 자기 변호가 아니라, 다시 바로 서려는 책임
분함(ἀγανάκτησις) —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한 분개
두려움(φόβος) —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 가벼움이 사라짐
사모함(ἐπιπόθησις) — 회복된 관계에 대한 그리움
열심(ζῆλος) — 식었던 마음에 다시 불이 붙음
벌함(ἐκδίκησις) —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책임

오늘 밤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만히 멈춰 있는 감정입니까,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감동입니까?


결론 감동의 자리로

금요철야의 자리는 감정을 쏟아놓는 자리만이 아닙니다. 감정을 들고 와서, 그것을 하나님의 감동에 내어드리는 자리입니다.

오늘 들고 온 후회·미안함·분노·답답함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숨이 그 위에 임합니다. 그 숨이 우리의 흙을 생령으로 만듭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회개가 우리를 살립니다.

"오늘 밤 당신이 흘리는 눈물이 감정에서 멈추지 않기를. 그 위에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기를. 그래서 일어서서 걷는 사람으로 이 자리를 떠나기를."

감정과 감동 사이

본문: 고린도후서 7:8-11

한 주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많은 일들, 그 가운데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스스로 다 할 수 없는 고민들을 가지고 왔고, 어떤 성도님들은 내 안에 해결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가지고 왔고, 어떤 성도님들은 이 한 주간의 삶을 통해 고통과 고난, 피곤까지도 가지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감정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에게 환난은 우리가 느끼는 깊은 감정입니다. 환난을 경험하며 기분 좋다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환난을 겪은 이에게 우리가 위로한다 하지만, 그 위로의 방법이 환난을 겪은 이에게 딱 맞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위로한다 한들 환난을 겪은 이의 마음이 풀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환난을 겪은 이에게 가장 좋은 위로는 그 환난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환난이 사라질 수 있다면, 그동안의 환난을 그저 큰 경험으로 여기게 되더라도 "이제는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삶의 변화가 우리의 감정 가운데 늘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환난을 겪으며 힘든 감정을 가지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능히 위로하시는도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지금의 환난을 위로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바울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정 — 그것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표현합니다.

디모데후서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표현을 다시 말하면 — 하나님의 말씀이 곧 감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의 환난 중에 있을 것인지,
감동의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있을 것인지,

여러분들은 감동과 감정,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습니까?

오늘 고린도후서 7장의 말씀을 통해서, 감동과 감정 사이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마음을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 근심"을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두고 — 전혀 다른 이 두 가지 마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 ·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까지, 한 교회를 향한 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기 전 직접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소식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 교회가 깊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음행이 공공연히 일어났으며, 성도 간에 법정 송사가 벌어졌고, 우상의 제물을 두고 다툼이 생겼으며, 영적 은사를 가진 이들은 서로 비교하기 바빴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쓸 정도로,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애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컸기에 — 바울의 마음이 그 교회를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애정을 담은 편지를 보냈으나, 바울은 그 마음 가운데서도 "너무 과하게 편지를 쓴 건 아닌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망의 편지를 쓰면서 —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디도가 바울에게 찾아와 소식을 전합니다.

고린도후서 7: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여러 환난 가운데 낙심하고 있을 때, 왜 디도가 와서 위로를 받았다고 했을까요? 디도가 전해온 고린도 교회의 소식이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근심했으나, 그 근심이 회개로 이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 · ·
고린도후서 7:8-9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후회하였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어느 유명한 책 제목 같기도 한 이 구절은 — 앞의 '후회'는 감정을 나타내고, 뒤의 '후회'는 감동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바울의 너무 솔직한 표현, "내가 후회했었다." 전도여행을 다니며 이런저런 수많은 경험을 했던 바울에게도, 성도들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통해 강하게 책망했지만 — 그것을 후회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편지를 보내고서 몇 날 며칠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강하고 담대하게 보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바울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 '후회하였으나…' 우리의 모습
우리가 자녀들에게 — 부족한 내가 무언가 가르침을 주겠다고 강하게 말했지만, 말하고 나서도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우리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괜히 말했나, 내가 너무 감정에 앞선 것은 아닌가? 너무 심했나… 하지 말걸…"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조차도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울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감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9절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놀라운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근심이 그들로 하여금 회개함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근심이 회개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회복을 보면서, 그 회복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회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후회하였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한 줄 — 한 문장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 · ·

곧바로 바울은 '근심'을 두 갈래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입니다.

고린도후서 7:10 (핵심 본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같은 '근심', 전혀 다른 두 결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세상의 근심 = 사망을 이루는 것

"근심" = 헬라어 λύπη(뤼페) — '근심·슬픔·고통'. 같은 단어이지만, 앞에 어떤 말이 붙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로 갈립니다.

'세상 근심'이라는 말이 붙으면 — 어떤 결과에 대한 근심,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하는 근심, 나를 평가하는 주변 상황에 대한 근심, 내가 받게 될 손해에 대한 근심… 이런 '세상 근심'은 우리의 자책 안에서 빙빙 돕니다. 도망가게 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바울은 그 끝을 "사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똑같이 마음이 무겁고, 똑같이 한숨이 나오고, 똑같이 눈물이 흐르지만 — 방향이 다릅니다. 우리의 자책 안에서 빙빙 돌지 않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 망가진 관계에 대해,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해 —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두게 됩니다. 바울은 그 끝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후회할 것이 없는"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근심은 늘 후회를 남기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를 남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근심은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 · ·

여기서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제목을 '감정과 감동 사이'로 적어 봤습니다. 이 본문을 많이 묵상하면서, 여기에 사람의 '감정'과 하나님의 '감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단어 같지만,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감정은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로 흐릅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 있을 때 반응이 일어나고, 그 자극이 멈추면 사그라듭니다. 어느 한 순간 강한 자극이 다가오면 우리 마음을 격하게 흔들지만, 어느 한 순간 지나가면 잊혀집니다. 감정은 사람을 흔들 수는 있지만, 그 사람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감동은 다릅니다. 감동은 나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밖에서부터 흘러 들어옵니다. 어떤 자극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결의 흐름처럼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우리를 자극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 안에 오랜 기간 머물러 있습니다.

감정과 감동,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감정은 자극으로부터 오지만, 감동은 우리 안에 흘러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동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요?

우리 몸 안에는 이미 감동이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곧 감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감동, 원어의 어근을 찾아보면 '숨', '생기'입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감동" = θεόπνευστος(데오프뉴스토스) —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God-breathed)
"생기" = 히브리어 네샤마(נְשָׁמָה) → 같은 어근 πνε-(프네, 숨/바람)
창조의 숨결과 말씀의 감동이 같은 뿌리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미 생기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감동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감동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 본문에 맞춰 다시 보면

"세상 근심" = 우리의 감정을 말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하나님의 감동으로 찾아오는 것

그래서 "세상 근심"은 감정의 자리에서 멈춥니다. 불안·우울·걱정에 머물러 벗어날 수 없고, 결국 바울의 말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기 때문에 — 우리가 살 수 있는, 소망을 품을 수 있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근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감정에 머물고 있으십니까,
감동에 머물러 있으십니까?

모든 일은 감정으로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험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순리대로 살아가면 참 좋지만 — 우리가 너무나도 연약하여 순간 순간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정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까?

"감동"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감동"으로 넘어오세요.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감동으로 넘어오면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 ·

자녀들에게 — "너 좀 반성해라", "너 그게 뭐니?",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니?"라고 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자녀들에게 감동이 되는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아내에게 이것저것 말하면서, 정작 남편인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내가 진심으로 여러분을 감동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아내분들도 — 세상의 남편들과 비교하며 남편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시지만, 정작 자신은 남편에게 감동이 되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모든 고난과 슬픔이,
가정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감동으로 변화된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면, 가정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가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감동이 넘쳐 흐르면, 자녀들이 변화하고, 아내들이 변화하고, 남편들이 변화됩니다.

· · ·

바울은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감동의 결과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일곱 가지 단어로 묘사합니다.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감동이 만드는 일곱 가지 흔적
간절함 — 이전엔 무관심했던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고
변증 — 자기의 변호가 아니라, 다시 바로 서려는 책임을 갖게 하고
분함 —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게 되고
두려움 —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 경외함이 생기게 되며
사모함 — 회복된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게 되고
열심 — 식었던 마음에 다시 불이 붙게 되며
벌함 —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달라져 가고 있다고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감동은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일으킵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밤 여러분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감정입니까? 감동입니까?
· · ·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가 금요철야예배, 이 늦은 자리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우리의 감정을 쏟아내기 위한 자리입니까? 물론 그런 우리의 연약한 모습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모든 것을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더 깊게는 — 우리가 한 주간 쌓아왔던 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 하나님의 감동으로 변화시키는 자리입니다.

살아오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감정들 — 후회, 분노, 답답함, 그리고 누군가에게 미안함까지.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그 위에 하나님의 숨결이 임하길 소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숨결을 통해 우리의 흙을 생령으로 만드십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이고, 회복입니다. 회개가 우리를 살립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일어났던 그 일들 — 한숨·눈물·무거움·분노가 바울의 편지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감동을 만나면서 회개로, 살아남으로,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밤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감정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은 우리를 바꿉니다. 오늘 밤 우리가 단지 감정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감동 안에 머물길 소망합니다. 그 감동이 회개를 낳습니다. 그 회개가 우리의 삶을 다시 일으킵니다.

오늘 밤 당신이 흘리는 눈물이
감정에서 멈추지 않기를.
그 위에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기를.
그래서 일어서서 걷는 사람으로
이 자리를 떠나가기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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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광염교회 | Seoul Light and Salt Church | 설교작성 이인수 (insoo@sls.or.kr) | ver.2026052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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